[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하던대로 하세요”
"모델처럼 걷기로 했어”라고 말했을 때 후배는 빙긋 웃으며 “그냥 하던대로 하세요”라고 했다. 모델처럼 엉덩이를 꼬며 걷는 것은 아니고 할머니처럼 엉거주춤 안 꾸부려 걷고 당당하게 어깨 펴고 걷는 거라고 설명했다. 유튜브에서 모델들 걷는 모양 흉내 내며 연습한대로 어깨 뒤로 제치고 두발을 교차해가며 직선으로 걸으면 된다고 시범을 보인다. 앞만 보고 직선으로 걸을려고 몸을 틀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지면 큰일난다고 주의를 준다. 몇 달 전 한인 어른 한 분이 두 차례나 넘어져 골절상을 당해 수술을 받는 일이 발생했다. 고래심줄 같은 고집을 아는 터라 “그럼 하고 싶은대로 하세요”로 결론을 맺는다. 애들이나 손주들에게 모델워킹 연습한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정신감정 받을 확률도 약간 있어 일단 비밀로 하고 실행에 착수한다. 시작이 전부다. 일단 해뜨기 시작할 이른 아침 동네 보도를 산책하며 모델 워킹을 하기로 한다. 보는 사람도 없고 봐도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나름 연구한대로 일단 허리에 힘주고 똑바로 서서 산만해 보이지 않도록 시선을 고정시킨다. 자신 있게 가슴을 살짝 내밀고(그동안 쫄아서 작은 가슴을 팔로 가렸다) 두 팔을 뒤로 제치고 스윙모션으로 가볍게 움직인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다리와 발 동작! 발을 일직선상에 번갈아 놓으며 걸어야 하는데 이때 무릎을 살짝 굽히며 다리가 스쳐 지나가게 한다. 이 때 모델들은 엉덩이를 섹시하게 비트는데 이 부분은 수정! 나이 고려해서 가볍고 유연하게 움직인다. 내가 어떤 꼴로 걷는지 나는 잘 모른다. 여성스럽게 안 걷고 발을 앞으로 내던지듯 터벅터벅 걷는 건 안다. 자서전 출간 겸 어머니 칠순잔치로 한국 갔을 때 고등학교 단짝이 “왜 몸을 굽히고 걷니? 어깨 펴고 걸어”라고 말했다. 동창들 틈에서 너무 튀고 건방져 안 보이려고 겸손 떨다가 꾸부정 아줌마로 전락했다.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 미국에서 보낸 날이 더 오래 됐지만 당당하면 잘난 채 해 보이고 수그리면 빈티 난다고 측은해 할 것이다. “너무 애쓰지마. 미국에서 살던대로 해. 어디서나 너답게 살아!”라고 친구는 내 손을 꼭 잡는다. “우리 엄마 좀 말려주라. 80이 넘었는데 다운타운에 자기 화랑을 오픈 한대.” 변호사 친구의 토로다. 그 어머니는 평생 유명 화랑에서 수석 큐레이트로 일했는데 나이(?) 때문인지 해고됐다. “너 보고 사업자본 대라 안 하시면 뭐가 문제? 하고 싶으신 일 하시게 해드려”라고 답변했다. 나이 들수록 하고 싶은 일 하고 살면 생이 즐거워진다. 나이 들었다고 포기하고 살면 식은 죽 먹기로 밍밍하게 산다. 똑 같은 반복, 매일 같은 음식, 헐렁한 옷 입고 늘어져 살면 할망구가 되는 건 시간 문제다. . 나는 꼭두 새벽에 일어나 해 뜨는 찬란한 시간을 혼자 즐긴다. 어제보다 다른 오늘, 빛나는 내일을 위해 예쁜 옷 골라 입고 단장을 한다. 나이 들어 꾸미는 화장은 예뻐 보이려는 것 아니고 못난 걸 감추는 작업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유쾌한 모습으로 사랑의 말들 나눌 수 있게 언어를 가다듬는다. 내 나이에 모델로 발탁될 일은 빅뱅이 일어나는 것처럼 가능성이 희박하다 해도 꼿꼿이 서서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걸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 오른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배우다 죽으면, 죽는 것도 한갓 생을 마감하는 공부가 아닐런지.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모델 워킹 어머니 칠순잔치 변호사 친구